프랑스 보르도의 한 와인 매대 2019년 모습. 천호성 기자


프랑스 신문 르피가로는 최근 ‘깜짝 놀랄 만한, 그러나 아직은 살 만한 부르고뉴 레드 15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올해 시장에 출시된 프랑스 부르고뉴 2023 빈티지 중 ‘가성비’가 뛰어난 피노누아 와인들을 추린 글이었다. 이름을 올린 와인들의 가격은 23유로(3만8000원)∼53유로(8만8000원). 알코올 12∼14도짜리 750ml 들이 술 한병이 8만원을 호가한다니 결코 ‘싼 값’으로 와닿진 않는다.
특히 이 숫자가 프랑스 ‘현지 가격’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부르고뉴 와인 인기가 세계적으로 치솟으면서 프랑스 사람들도 4만∼8만원을 “부르고뉴 기준으로대창단조 주식
‘온건한’”(르피가로 기사 표현) 값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마저도 “가격이 오르기 전에 반드시 주목해야 할 생산자들”이라고 르피가로는 부연했다.
지갑을 열게 만드는 술
주변에 와인을 권하면 가끔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와인에 맛 들였다가 가계 기둥뿌리 뽑을까 무서워요.” 부인하기 어려운 말이다. 한국은 수입 술에 주식방
붙는 높은 세금과 수입업체 유통 마진 등으로 세계적으로 와인값이 비싼 편이다.



프랑스 생테밀리옹의 포도밭. 천호성 기자


더구나 와인은 대체로 ‘비쌀 수록 잘 만든’ 술이다. 맛있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산미와한솔인티큐브 주식
당미·탄닌(떫음) 등의 균형을 맞춰 모나지 않은 와인을 빚으려면 섬세한 양조 솜씨가 필요하다. 여기 투입되는 인력과 시설, 기술 수준이 와인 값에 반영된다. 와인 어드보케이트나 와인 스펙테이터 같은 글로벌 평론지의 고득점까지 받으면 ‘이름값’마저 가격에 더해진다.
그래서 ‘와인은 불가역적’이란 말이 와인 팬들 사이에선 대개 상식으로 통한릴게임횡금성
다. 한번 좋은 와인에 맛을 들이면, 그보다 평범한 와인에는 감흥이 덜해진다는 얘기다. 더욱 강하고 다채로운 향을 뽐내는, 완성도 높은 와인을 경험하고자 애호가는 자기도 모르게 지갑을 연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 생산자 ‘테누타 델레 테레 네레’ 에트나 로쏘 2018 빈티황금성2
지. 천호성 기자


그래도 ‘가성비 와인’은 있다
다만 와인 세계에도 가성비는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훌륭한 환경에 비해 아직 유명세를 덜 탄 생산지의 와인들이 그렇다. 위에서 말한 ‘이름값’이 덜 붙은 경우다.
비교적 최근에 포도밭으로 개간되어, 조방적인 농법으로 대량 생산을 하는 지역의 와인값이 합리적인 편이다. 프랑스에선 남부의 광활한 생산지인 랑그독-루시용이 대표적이다. 풀리아·캄파니아·시칠리아 같은 남부 이탈리아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과거엔 식사에 곁들일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테이블 와인)을 많이 생산해왔는데, 최근엔 생산량·품질을 동시에 잡는 추세다.
지중해 햇살을 머금은 진한 과실미의 와인을 찾는다면 대형마트에서 이 지역 와인들을 골라봐도 좋겠다. 랑그독의 제라르 베르트랑(Gerard Bertrand)이나 풀리아의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Feudi di San Gregorio), 시칠리아의 테누타 델레 테레 네레(Tenuta delle Terre nere) 같은 큰 생산자의 엔트리급 와인은 2만∼3만원대에 나온다. 맛과 향은 이들보다 2만원 이상 비싼 부르고뉴 기본급 와인 못지 않을 것이다.
보르도·부르고뉴(이상 프랑스), 피에몬테(이탈리아), 나파밸리(미국)처럼 병당 수백만원짜리 고가 와인이 수두룩한 명생산지에도 가성비 와이너리는 있다. 이전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농법·양조 방식을 바꿔 품질을 끌어올렸거나, 기라성 같은 이웃 생산자의 유명세에 가려 ‘아직은’ 관심에서 비켜난 곳들이다.



‘필리아 드 그랑 멘느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2011 빈티지. 천호성 기자


‘그랑 크뤼’ 아니어도 맛있는 와인 찾기
개인적으로는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마을에서 이런 숨은 보석들을 찾기를 좋아한다. 이곳에서는 10년마다 와이너리 품질을 평가해 우수한 곳에 ‘뛰어난 밭’이라는 뜻의 ‘그랑 크뤼 등급’(Grand Cru Classe)을 부여한다.(이는 마을 이름의 ‘그랑 크뤼’라는 지명과는 별개의 호칭이다.) 이런 와인엔 이름값에 따른 ‘프리미엄’이 따라붙는 편이다.
그런데 등급 평가 때마다 공정성을 두고 갈등이 일어 일부 샤토(생산자)는 아예 심사를 신청하지 않는다. 이 마을 200여개 샤토의 품질이 워낙 상향평준화 돼 있어, 상위권 10여개를 빼면 등급의 ‘변별력’이 크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등급이 없어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뒤지지 않는 와인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생템므’(Saintayme Saint-Emilion Grand Cru)와 ‘샤토 토지나 레르미타주’(Chateau Tauzinat l’Hermitage Saint-Emilion Grand Cru)는 20유로(3만3000원) 정도 가격이 무색한 발군의 와인으로 기억된다. 100% 메를로로 빚은 생템므 2015 빈티지(2022년 시음 기준)는 검은 자두와 체리, 다크초콜릿이 코에서부터 넘실거린다. 맛에선 과즙미를 배경으로 토바코·후추의 매콤함이 솟아 다채롭다. 메를로 특유의 밀도감이 두드러져 제법 우아하기까지.
샤토 토지나 레르미타주 2011 빈티지(2020년 시음 기준)는 말린 자두나 건포도를 필두로 앞서보다 훨씬 진득하고 건조한 느낌이다. 반면 입에선 무겁지 않은 밀도에 체리류 과즙이 신선하다. 여기에 바위 같은 철분내와 박하류 허브향이 술을 넘기고서도 길게 이어진다. 둘 모두 생테밀리옹 메를로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누가 마셔도 맛있을’ 와인이라고 본다.
르피가로는 지난 7월 ‘가성비 뛰어난 2024 빈티지 보르도 와인 20선’을 추렸는데 반갑게도 이 기사에도 이들의 이름이 보였다. 르피가로는 전자를 두고는 “푸른 과실이 촉촉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후자에는 “겨울밤 벽난로 곁을 들려주는 향”이란 낭만적인 한줄평을 남겼다.



‘루이스 엠 마티니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18 빈티지. 한때 ‘가성비 와인’으로 즐겨 찾았다. 천호성 기자


나만의 ‘루키’ 와인을 찾아서
물론 ‘나만의 가성비 와인’도 어느 틈에 몸값이 뛰어 연이 끊기곤 한다. 권위 있는 와인 시상식에서 큰 상을 타거나 유튜브에 소개돼 일약 스타가 되는 경우다. 어떤 와인은 나 말고 국내에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수입이 중단돼버린다. 그렇게 멀어진 나파밸리, 키안티 클라시코(이탈리아), 남부 론(프랑스) 와인들이 숱하다.
그래도 가격표 뒤에 ‘0’이 하나 더 붙어 나타나는 와인들을 보면 서운함만 드는 건 아니다. ‘크게 될’ 와인을 먼저 알아봤다는 뿌듯함과, 저걸 이미 마셔봤다는(혹은 사뒀다는) 안도감도 있다. 루키를 발굴한 스포츠 스카우터처럼 말이다.

천호성의 천병까기는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 읽을 수 있습니다.)

▶천병 마셔본 기자의 와인 ‘쉽게’ 고르는 법

https://www.hani.co.kr/arti/culture/travel/1213189.html?h=s

▶포도밭 사이로 대서양의 짠 바람…“이게 테루아구나!”

https://www.hani.co.kr/arti/culture/travel/1201221.html?h=s

▶보르도 ‘그레잇 빈티지’의 맛

https://www.hani.co.kr/arti/culture/travel/1210856.html?h=s

▶신문사 사표 내고 떠난 보르도 유학, 인생을 바꾼 와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travel/1208411.html?h=s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